칼의 노래를 읽고


나는 칼의 노래의 책머리를 먼저 읽고 생각에 빠졌다. “나는 인간에 대한 모든 연민을 버리기로 했다. 연민을 버려야만 세상은 보일 듯싶었다. 연민은 쉽게 버려지지 않았다. 그해 겨울에 나는 자주 아팠다.” 는 김훈의 말은 보잘것없는 나약함을 버리려고 하는 장수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 세상에 옳고 그른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사실이 있고, 그 사실들을 해석해 바라볼 수 있는 무수히 많은 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인간에 대한 연민이 가득한 관점을 인류애, 또는 용서하는 너그러움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관점을 가지려고 노력해왔다. 예를 들어, ‘정의라는 개념은 복수심을 그럴듯하게 포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내가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다짐, 그리고 남이 공정하지 않게 (, 납득할 수 있는 이유없이) 나보다 많은 것을 얻었을 때 오는 시기심인 것이다. 좀 더 너그러운 사람이었다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들을 정의로 무장한 사람들은 걸고 넘어진다. 너무 일반화하는 정의(definition) 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정의(justice)를 적용하는 일이 사소하거나 크게 느껴지는 것의 차이일 뿐, 앞서 말한 그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리고 나는 시시비비를 가리고 정의(justice)를 운운하던 나의 모습에 회의감을 느껴 너그러움, 인류애, 즉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나를 새로 채우고자 했다. 그래서 내가 추구한 바와 상반된 이야기를 하는 김훈의 서문이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나는 자기방어적 욕구가 솟아오르는 것을 억눌러야 했다.

이 책에서 이순신의 관점이 연민을 버린 김훈이 세상을 바라본 관점과 동일하다고 생각하고 책을 해석하고자 했다. 책을 얼핏 보면, 정말 인간에 대한 연민이 없는 사람이 쓴 것처럼 전쟁의 추함과 잔인함이 건조한 문체로 서술되어 있다. 문장은 간결하며, 사람들이 죽고 서로 죽이고 약탈과 강간을 하는 모습은 감정이 들어간 형용사 하나 없이 객관적 사실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이순신도 무관으로써 전쟁과 정치의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늘 과묵함을 유지한다. 하지만 사람이 완전히 감정을 초월할 수는 없다. 이순신도 사람인지라, 아들의 죽음에 슬퍼하고, 충직한 부하에게 죽지 말라고 말하며, 백성들의 눈물에 약해진다. 그렇다면 이순신은 인간에 대한 연민을 버리지 못한 것이고, 이순신에 자신을 대입해서 이 글을 상상해낸 작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실 난중일기와 선조 실록과 같은 역사서를 소설로 각색했다는 것은 작가가 역사를 사건의 흐름이 아닌 피와 살, 그리고 감정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로서 중요하게 여겼다는 뜻이 된다. 결국 책머리에 나온 김훈의 노력은 결국 실패한 걸까?

결국 이순신과 김훈은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나약함, 즉 인간에 대한 안일한 연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것이 하찮다고 생각하고 나약함을 억제하고자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젊었던 나는) 그 하찮음들은 끝끝내 베어지지 않는다는 운명을 알지 못했다” (pg.124)
그 씨내림의 운명을 힘들어하는 내 슬픔의 하찮음이 나는 진실로 슬펐다” (pg. 126)
이순신은 아들 면이 꿈에 나와 칼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해도 매몰차게 외면하며, 면의 죽음을 슬퍼하는 자신도 하찮게 여기는 가혹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그는 악몽 속에서 노을 지는 갈대밭으로 돌아가는 아들의 이름을 부르고, 자신의 하찮음과 이 세상의 하찮음들은 물리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한다. 김훈은 인간에 대한 연민을 지우지 못해 이 책을 쓴 것이 아닐까? 사람들은 연민, 특히 자기연민에 갇히는 순간 나약하고 자기 자신밖에 모르게 된다. 나를 가엾이 여기느라 세상을 돌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민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강한 감정 중 하나로,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다. 또한, 연민은 선을 베푸는 동기이기도 하기 때문에 긍정적인 면도 분명 있다. 그러니 연민을 받아들이되 연민으로 인해 약해지지 않고, 그 상황과 감정의 하찮음을 인지하여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순신이 하찮지 않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상황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계속 무사로서 살아가는 것은 무엇에 대한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걸까. 하지만 적과 그들의 칼에서 나오는 사나움의 근원을 모르면서도 자신과 적을 구분하고 싸워야 할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면, 이순신은 모든 것을 용서하고 받아들여 주지는 않으며, 동시에 모든 것을 하찮게 여기는 회의주의자로 추락하지 않는다. 이순신은 아마도 나라의 신하로서 자신의 운명을 믿었던 것 같다. 자신을 나라의 부속품으로 낮추고 삶의 목표에서 자신을 지웠기 때문에 기계처럼 멈추지 않고 앞으로 전진한 것이 아닐까?

죽을 때, 적들은 다들 각자 죽었을 것이다. (…) 적병들이 모두 적의 깃발 아래에서 익명의 죽음을 죽었다 하더라도, 죽어서 물 위에 뜬 그들의 죽음은 저마다의 죽음처럼 보였다. (…) 내 부하들의 창검과 화살을 받는 순간부터 숨이 끊어질 때까지 그들의 살아 있는 몸의 고통과 무서움은 각자의 몫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각자들의 몫들은 똑같은 고통과 똑같은 무서움이었다 하더라도, 서로 소통될 수 없는 저마다의 몫이었을 것이다.” (pg.115-116)

몫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점이 인상 깊다. 몫이란, 마땅히 할당 받는 개인의 책임, 임무에 사용하는 단위이다. 수학에서는 나눗셈의 결과이다. 고통만큼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는 말이 있다. 인간은 태어나서 감내해야 할 고통이 주어졌다고 이순신은 생각하는 것 같다. 다들 똑같은 일을 겪고 있으니까, 연민이란 감정을 부여해서 누군가의 몫을 더 특별하게 여기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다.

            나는 이순신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전쟁이나 폭력을 본 적조차 없고, 스스로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내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이 차이는 내가 어리고, 이순신과 이순신에 자신을 대입한 김훈은 나이가 많아서 생긴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도 훗날 내 몫의 고통이 있을 것이다. 그 고통이 왔을 때 이순신처럼 그 하찮음을 알고, 하찮음을 받아들이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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